촛불 이후, 새롭게 등장한 정치적 질문들

  • 이관후 |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촛불이 70년대 성장주의의 신화와 전체주의의 향수라는 전근대적 앙시앙레짐을 철폐시키고 근대적 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가져왔다면, 촛불이 남긴 과제는 근대적 민주주의의 한계, 곧 탈(脫)근대적 과제들이다. 이런 한계와 과제는 촛불 그 자체에서도 드러났으며, 촛불 이후에 특히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촛불의 핵심적 구호였던 ‘국민주권’이 전형적으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국민주권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이 지향한 근대 국민국가의 핵심적 목표이자 수단으로서 제창됐으나, 실제로는 성별과 재산권, 피부색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차별적으로 적용됐다. 또한 실질적으로는 차별받은 자들의 오랜 투쟁을 통해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확립된 권리다.
우리의 경우에도 해방과 정부수립으로 인해 1940년대에 선언적으로는 구현됐으나, 실제로는 87년 민주화 이후에야 헌법에 다시 명시됨으로써 법적으로 재확립된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이라는 근대국가 역시 1948년에 일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1987년까지 약 40년에 걸쳐서 국가 수립과정 속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한국에서 국민주권이 확립된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은 법률적으로 국민주권이 재확립된 87년을 넘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동한 2017년에 실질적으로 완료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시민들의 촛불로 박근혜 정부를 종료시킨 2017년이야말로 한국에서 정치적 근대화가 완성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탈(脫)근대적 과제의 시작

그러나 근대화의 완성은 곧 또 다른 탈근대적 과제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정체성 선별과 ‘주권’의 결합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통합의 이데올로기이자 동시에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 곧 외국인과 여성, 노예를 배제하는 원리였듯, 국민주권은 필연적으로 국민이 아닌 자들을 배제하는 근대적 민주주의의 원리다.
촛불에 참여했던 여성, 비정규직, 저소득층, 무주택자, 청년, 노인, 외국인 노동자는 여전히 형식적인 투표권 이외에 별로 가진 것이 없다. 87년 이후 기존 사회의 엘리트에 더하여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이 실질적인 주권을 획득했다면, 나머지 사람들 대부분은 여전히 선언적인 ‘주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성별이 다른 성별에 비해 절반을 겨우 넘어서는 임금을 받고 있으며, 왼쪽 바퀴와 오른쪽 바퀴를 끼우는 노동자가 고용의 형태에 따라, 혹은 피부색이나 국적에 따라 2배 차이가 나는 임금을 받는 곳에서 주권은 작동하고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소외된 이들이 원하는 주권, 곧 주인의 권리가 본래 근대적 국민국가에서 실현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근대 국민국가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관대했지만 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인색하고, 특히 재산에 대한 권리를 배타적으로 강화했다. 한국에서는 특히 이처럼 수적으로는 거대하나 정치적으로는 부재하는 ‘거대한 소수’들에게, 국민국가를 넘어서 민족의 이름으로 동원과 희생을 강요하는 ‘민족국가’의 경향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촛불 이후 혜화역 집회에 대한 공격, 예멘 난민에 대한 혐오, 심지어 KTX 승무원 정규직화에 대한 20~30대의 반응은, 통합과 동시에 배제의 논리로 작동하는 ‘국민주권’의 근대적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요컨대, 국민국가가 완성된 순간에 그것이 국민 주권이 가진 이중적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민주주의, 혹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 혹은 무엇인가의 재발견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가능하지 않고, 정치적인 것의 발견 역시 곧바로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방향성에 대한 모색을 해 볼 수 있다.

정치적 대표의 다양한 현시(現示)

첫 번째로는 목소리 없는 자들, 곧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 자들을 공공의 장에서 현시(現示)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피지배층을 지칭하는 개념과 용어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억압당하는 피지배자로서의 민중, 착취당하는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분배에서 소외된 몫 없는 자들, 인권을 보호받지 못한 ‘호모 사케르’ 등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이들이 거대한 소수이면서 공적 공간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20세기적 민주주의의 특징은 정치적으로 대표될 자격이 있는 ‘유권자성(Constituency)’이 선거와 영토, 인간, 위임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선거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가 커지고 특히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에 따라 정치적 대표의 방식과 원리에 대한 급진적인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변화의 방향은, ① 선거에서 → 비선거로, ② 영토에서 → 정체성으로, ③ 인간에서 → 비인간(자연)으로, ④ 위임에서 → 주장으로의 변화다.
구체적으로 보면, ① 대표가 대표성을 가지게 되는 절차가 선거를 통한 선출에서 이해당사자 간의 합의, 갈등관계에 있는 소수자들의 참여, 추첨에 따른 무작위 대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② 피대표자의 권리가 근대 국민국가의 영토에 기반을 둔 국민성을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부여되던 것이, 다양한 지구화를 배경으로 한 국제적 이슈의 등장과 협력의 필요성, 국경을 넘어선 인권의 가치 등이 중요시되면서 피대표자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재정립되고 있다. ③ 인간만이 대표될 권리를 가졌다고 보는 시각에서 비인간, 특히 다양한 생물체와 자연물에 이르기까지 피대표성이 확대됐다. ④ 이전에는 대표-피대표자 간에 구체적인 위임의 절차가 있어야만 대표성이 있다고 간주됐으나, 누군가가 특정인(사물)을 대표하는 주장을 하고 그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되면 대표성을 가진다는 견해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핵심적인 요소는 대표제에서 오랫동안 잊혀왔던 유권자, 혹은 피대표자의 정체성과 자격 문제다. 우리는 흔히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주권의 실현 수단으로서 투표권이 주어지고,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 유권자이며 이들만이 대표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권자 개념을 정치적 대표를 선출하는 모든 기준으로 여겨온 것이 잘못은 아니다. 지역구 소선거구제가 반드시 비례대표제보다 열등한 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곳에 거주하는 것만으로 누구에게나 동등한 정치적 권리가 부여된다는 것은 실로 평등주의적 발상이었는데, 이는 고대 아테네에서 클레이스테네스가 유권자의 개념을 ‘부족’에서 ‘거주민’, 곧 ‘시민’으로 바꾼 것이 그 시초다. 그리고 거주의 개념을 곧 평등한 정치적 권리로 이해한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 이후 2천 년 후에나 다시 근대 국민국가에서 나타난 혁명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영토나 특정 지역구에 기반을 둔 유권자, 피대표자 개념은 지속적으로 약화됐다. 지구적 무역과 분업, 초국가적 기업들의 출현과 신자유주의적 금융질서, 기후변화, 이민 같은 세계화의 요소들은 비영토적 대표성의 문제를 촉발했다. 한 국가 내에서도 사회경제적 가치들이 충돌하면서 지역적 대표성보다는 가치를 중심으로 대표 개념의 재조직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동시에 젠더, 종교, 종족, 민족, 환경 등 가치 지향 같은 집단적 정체성이 정치적 대표를 통해 반영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일부는 실제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런 정체성은 단지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뿐 아니라 그런 정체성을 스스로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도 부여될 수 있다.
이런 변화의 맥락에서 볼 때, 촛불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대표성을 현재의 정당체제, 선거제도, 나아가 정치구조가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연동형비례대표제라든지 권역별비례대표제, 중대선거구제, 도농복합선거구 등의 구체적 선거제도를 몇 가지 놓고 적당히 정치적 타협을 해나가는 수준 이상의 근본적 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의 선거제도가 가진 문제점에 있어 정당의 비례성을 높여야 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의 대표를 넘어 실제의 대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정당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여 다양한 소수정당과 지역정당이 적어도 기존정당, 거대정당들에 비해 차별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정당법은 5개 시도 이상의 지역에 시도당을 가지며 각각 1천 명 이상, 전국적으로 5천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해야 창당이 가능하다. 이런 정당설립 조건의 강화는 정치시장에 새로운 정당의 진입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특히 중앙당의 소재지를 수도로 명문화하고 있어서 근본적으로 지역정당의 창당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또한 단지 국회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임의적인 교섭단체들에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우선 배분하는 등의 문제점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된 후보를 선택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선거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 우선 영국, 미국, 독일 등의 국가들처럼 선거운동에 대한 제한규정을 폐지해야 한다. 또한 선거운동의 방법 및 수단에 대한 규제들을 획기적으로 완화해야 한다. 이는 선거법 자체를 규제 위주에서 선거운동 활성화의 방식으로 전면 개편할 것을 전제로 한다. 재력이 풍부한 후보자들에게 유리한 현행 정치자금법을 개정해야 한다. 고(故) 노회찬 의원의 사례에서 보듯, 후원회의 결성을 제한하고 있는 현행법은 돈 있는 후보, 대형정당의 후보에게 지극히 유리한 불평등한 정치적 장벽이다.
선거제도, 정당법, 선거법, 정치자금법 등 정치개혁 일반에 대한 현재의 논의에서 크게 누락된 것은 정당들의 공천과정에 대한 시민들이 감시와 개입이다.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정당의 자율성 강화와 당원 권리의 확대라는 편형과, 다른 방향으로는 국민경선이라는 포퓰리즘적 편향이 나타나고,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정당들이 그 둘 사이를 진동하는 잘못된 관행이 민주화 이후 내내 지속돼 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치적 대표의 선출이라는 점에서 볼 때, 공천문제의 핵심은 그것의 투명성이나 결정주체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권리, 어떤 가치를 반영하는 후보를 선출할 것인가 하는 대표의 원리에 관한 원칙을 각 정당이 어떻게 세우는가, 그리고 그 원칙을 결과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는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정당이 유권자들 다수의 투표에 영향을 주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이 과정에서 정당들에 개입할 권리와 의미가 있다.
시민의회나 시민패널, 공론조사 등의 추첨에 기반을 둔 대표제는 정치적 대표성의 측면에서 다양성의 확보라는 장점을 가지나, 본질적으로 대표-책임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권한 위임의 근거와 절차가 불확실하다는 단점을 갖는다. 지금이라도 기본적인 개념부터 차근차근 다시 접근해 나갈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정치적인 것’에 대한 도전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에서는 제도화 못지않게 삶의 민주주의가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20세기 고민의 핵심주제가 노동하는 인간의 삶이었다면, 촛불 이후 21세기에는 노동하지 않는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것은 촛불 이후의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이, 삶을 지탱할 구조적 기반의 조성과 더불어 탈성장 시대의 탈노동적 삶과 같은 대안적 비전을 동시에 요구한다는 의미다. 또한 이것은 삶의 방식, 삶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며, 따라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해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테두리 안에 갇혀있는 현재의 논의구조는 답답하다. 오히려 논쟁의 구도는 성장이냐 탈성장이냐의 문제, 노동에의 존중과 노동하지 않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돼야 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의료보험과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을 만들었듯,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 또 100세까지 살게 될 우리 자신을 위해 기본소득은 사실상 피할 수 없는 제도다. 이 제도를 어떻게 계획하고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야말로 촛불 이후, 미투와 혜화역 시위, 민주노총이 주최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시위와 같은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등장과 더불어 우리가 반드시 직시해야 할 새로운 정치적인 것의 출현에 답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글·이관후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공저서로 『탈서구중심주의는 가능한가: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우리 학문의 이론적 대응』이 있다. 

※ 이 글은 지난달 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촛불혁명 2주년 학술토론회에서 발표된 것으로 주최 측과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췌, 게재됨을 밝힙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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